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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상실에 관하여 : 슬픔에 충분한 시간을 배려해도 괜찮습니다 | 241231

by 해적거북 2025.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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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상실에 관하여 : 슬픔에 충분한 시간을 배려해도 괜찮습니다
다시, 상실에 관하여 : 슬픔에 충분한 시간을 배려해도 괜찮습니다

 

상실로 인한 슬픔은 다섯 단계로 우리를 찾아온다고들 합니다. 부정과 분노, 타협과 절망 그리고 수용.

부정否定의 단계에서 우리는 충격으로 정신이 멍해집니다. 인생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엘리자베스 로스는 이 감정이 ‘우리의 영혼을 감싸주는 장치’라고 설명합니다. 심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에 대해 반대의 질문을 던지는 것이죠. 이럴 수는 없다고, 말이 안되지 않느냐고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묻습니다.

이때 자신에게 발생한 충격을 되풀이해서 이야기하는 것, 믿을 수 없어 거듭 질문을 던지는 것은 정신적 충격을 줄여준다고 해요.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겪은 상실에 대해 얘기하고 또 얘기하는데, 그것은 마음이 정신적 충격을 다루는 방법이다. 또한 상실의 현실을 받아들이려고 애쓰는 동안 고통을 부정하는 방식이다. (…) 

마음이 강해지면 부정은 서서히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치유가 되면서 지금껏 부정해 왔던 모든 감정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_『상실 수업』에서

 

현실을 믿기 시작하면서 찾아오는 감정은 분노입니다. 신기한 것은, 화를 내기 시작한 사람들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상실을 막을 수 없었던 자신과 그 상황에 대해, 때론 절대자에게도 끝없이 화가 납니다. 

 

“분노는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사랑하는 사람이 건강에 더 신경 쓰지 않았던 것에 화가 나고, 사랑한 이를 더 잘 보살피지 못했던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난다. 분노가 논리적이거나 타당할 필요는 없다.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지 못한 자신에게 화가 날 수도 있다.”
_『상실 수업』에서

 

이때 분노의 감정을 막아서는 안 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분노 아래에는 사실 고통이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분노하고 있다는 것은 치유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즉, 수면으로 올라오기에는 너무 이른 감정들을 서서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판단하지 말고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고 분노 그대로를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 

삶은 불공평하다. 죽음 역시도 불공평하다. 분노는 상실의 불공평함에 대한 자연스런 반응이다.”
_『상실 수업』에서

 


 

타협은 죄책감이 동반하는 단계입니다. ‘만일 그랬더라면… 어떻게 됐을까?’라는 생각의 미궁으로 빠져드는 상태죠.

타협하는 시간 동안 우리는 과거 일을 계속 되돌려보며 괴로워합니다. 하지만 매번 슬픈 현실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타협의 단계를 거치는 이유는, 그것이 슬픔 속 고통을 줄여주기 때문입니다.  

 


 

타협의 단계 다음은 절망입니다. 모든 것이 공허하고 의미 없이 느껴집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어머니를 잃고 쓴 『애도일기』에는 이 절망의 고통이 생생하게 담겨있습니다.

 

“무거운 마음 안에서 살아가는 일, 그밖에 내가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다.”

“외로움=대화를 나눌 사람이 집에 없다는 것. 몇 시쯤에 돌아오겠노라고, 또는 (전화로) 지금 집에 와 있어요, 라고 말할 사람이 더는 없다는 것.”
_『애도일기』에서

 

종종 사회는 “강해져야 한다”며 슬픔에 빠진 이들을 절망감에서 끌어내려고 노력하죠. 

하지만 저자는 묻습니다. 슬픔을 외면하고 쇼핑을 나가는 것과 슬픔을 마주하는 것, 둘 중 무엇에 더 많은 강인함이 필요하냐고요.

절망감에 빠진 이들을 위한 치유책은 ‘오직 절망감을 받아들이는 것뿐’이라고 엘리자베스는 말합니다.

 

“단지 슬픔 곁에 앉으라. 슬프면 자신이 그 슬픔을 느끼게 하라. 분노와 실망에게도 이같이 하라. 하루 종일 울어야 한다면 그렇게 하라. 상처를 억누르거나 또는 표현할 정도로 충분히 아물지도 않았는데 인위적으로 꺼내려고 하는 것만 피하면 된다. 

여기서 얻어야 할 것은 고통을 느끼고 난 후 찾아오는 해방감을 느끼는 것이다.”
_『상실 수업』에서

 

중요한 건 우울증과 합당한 슬픔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장기간 또는 극도의 절망 상태가 이어진다면, 반드시 의학적 치료가 필요합니다. 

다만 슬픔과 함께 찾아오는 정상적인 절망까지 너무 빠르게 벗어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는 게 저자의 조언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알라. 정작 피해야만 하는 일은, 쏟아내어야 할 눈물이 충분히 빠져나오기 전에 울음을 억지로 멈춰버리는 것이다. 30분 동안 울어야 할 울음을 20분 만에 그치지 말라. 눈물이 전부 빠져나오게 두라. 그러면 스스로 멈출 것이다.”
_『상실 수업』에서

 


 

슬픔의 마지막 단계는 ‘수용’ 단계입니다. 수용이라고 해서 “이제 괜찮아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현실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슬프게도 상실을 경험하기 전과 똑같은 현실은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사랑한 이의 상실에 대해 이상 없음 또는 괜찮다고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수용의 단계는 사랑한 이가 실제로 떠나버린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 새로운 현실이 영원한 현실임을 인정하게 되는 단계이다. 

이 현실을 결코 좋아하지 않을 것이며, 또는 헤쳐 나가보려고도 하겠지만 결국 받아들이게 된다.”
_『상실 수업』에서

 

엘리자베스는 냉정하게 말합니다. 

 

“수시로 그와 관련된 기념일이 돌아올 때마다, 그간 네가 힘들여 꼭꼭 눌러두었던 슬픔은 여지없이 또 분출될 거야. 그러나 기억해. 어떤 경험을 하든지 그 안에는 늘상 슬픔이 웅크린 채 숨어있지.”
_『상실 수업』에서

 

엘리자베스는 떠나간 이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 슬픔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권합니다. 특히 “떠난 이들이 보냈음직한 답장을 스스로가 써보는 것이 치유에 영향을 준다”고 말하죠.

방법은 간단합니다. 평소 글씨를 쓰는 손(오른손잡이라면 오른손)으로는 자신이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쓰고, 반대편 손으로는 떠난 이가 건넬 것이라 생각하는 말을 상상해 쓰는 겁니다. 

 

“사랑한 이가 떠나버린 후에라도 그에게 편지를 쓰라. 당신이 어떻게 지내고 그들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말하라. (…) 

만일 무덤 앞에 있었다면 했을 말들을 편지로 옮기라. 다음에 사랑한 이의 무덤을 찾았을 때 지금껏 쓴 편지를 다 모아 그에게 읽어주면 그 편지들이 결국엔 당신을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_『상실 수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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